기생충의 정체성 생각편린

영화계가 워낙 시뻘건 사상에 경도되어 있기에 다들 기생충 역시 좌파영화일거라고 속단하지만, 
막상 보고나면 좌익도 우익도 뭣도 아닌 그냥 봉준호 영화다. 
다만 과거 뛰어난 영상미와 각 씬에서 전해지는 감독의 침착한 시선이 인상적이었던 살인의 추억에 비하면 
기생충은 작정하고 상 받으려고 만든 영화가 아닐까 싶을정도로 고도의 기획력이 엿보인다는 것. 
그럼에도 감독 개인의 창작력이 주도하고 상업적 기획은 단지 거들 뿐이었기에  
국제 영화상까지 휩쓴 것인지도.. 
물론 오스카상 수상 여부에 로컬축제(백인들만의 잔치)라고 답한 봉 감독의 팩트폭격에 
자존심이 상한 오스카의 반격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이 동양인 감독의 영화가 주는 메시지가 백인 사회에 정통으로 어필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여기부터 스포)


만약 기생충의 결말이 단순히 가난한 집의 승리로 끝났다면? 
단언컨대 그 어떠한 상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계층 간의 갈등 원인인 '가난'이  보편적 도덕심을 어겨도 되는 면죄부로 비치게 되는 순간 
이 영화는 극소수의 프로파간다, 사회 전복 세력만을 대변하는 마이너 영화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생충은 다르다. 

살인의 추억처럼 담담하고 관조적이다. 
누구의 편을 들지도 않고 세계를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계층과 빈부 갈등의 '긴장감'을 한순간도 놓지 않는다. 

가진 자의 여유도 이유가 있고, 부도덕한 자에게도 그 본능적인 이유가 있다. 
그러나 송강호가 부잣집 저택에 기생충처럼 갇혀 가족과 헤어진 어두운 결말을 통해서, 
그 이유가 보편적 도덕 가치를 뛰어넘도록 용인하지도 않는다. 

가난은 원죄가 아니다. 
탐욕도 원죄가 아니다. 
그러나 가난과 탐욕이 만들어낸 결과는 그 개인의 문제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인 것이다. 
가난한 아버지는 영악한 자식에게 기생하고 
빈자는 부자에 기생하고 
우리 모두가 사실은 여기저기 기생하는 관계..

그 관계의 사슬 속에 
누구든 오를 수도 내려올 수도 있는 계층의 계단이 있다..
계단과 그 부자의 집(시스템)은 변함이 없지만, 
시스템 안에 거주하는 사람만이 시간에 따라 대체될 뿐인 사회..

이 사회를 객관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지켜야 하는 도덕의 기본적 가치, 계층 갈등이라는 화두 이 모두를 동시에 던졌기에
기생충이 백인들의 로컬 잔치에 큰 충격을 주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결론을 확장해서 이어가자면, ​
그러니 나라님의 첫 번째 책무는
각각의 국민을 가난에서 부요함으로 이끌어내는 것이다.  

과연 지하방 가족이 기초 생활 수급과 국가의 보조금으로만 안분지족했다면
도덕의 일탈이 있었을까
다시 말해, 인간의 본능이 있는 한, 타고난 개인의 차이가 있는 이상에는, 
국가가 던져주는 시혜성 복지만으로는 가난이라는 사회적 부조리를 해결할 수 없다는 거다. 
가난한 자를 중산층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사회적 역동성만이
부조리를 그나마 치유할 수 있다고 나는 본다. 

그런데, 

​이 시부랄것들의 프로파간다 공산주의자들은 필연적으로 중산층을 붕괴시키고 
가진 자의 부의 독식을 지탄하는데 빈자들을 선동하여 끝내 집권 후에는, 
그들이 애초에 지탄했던 부의 독식을 그들 집권당과 그 집권당의 커넥션이 있는 계층으로 환원시키는 동시에 
계층 간의 사다리마저 걷어차버린다. 

하여 굳이 깨어있을 필요도 없다. 
최소한의 논리만 있으면, 
각 개인은 사기꾼들이 정치판을 기생하는 대참사를 막을 수가 있다. 
1%를 지탄하는 각종 거짓말에 조심하자. 
저들이 우리의 자유를 파먹지 않도록 감시하자. 

뭐 등등.. 각종 별 잡상이 다 떠오르는 영화였다. 


결론. 

1. 기생충은 상 받을만했다. 
2. 살인의 추억이 더 재밌었다. 








 




덧글

  • shaind 2020/02/13 01:29 #

    "가난한 자를 중산층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사회적 역동성만이 부조리를 그나마 치유할 수 있다고 나는 본다."

    이건 한국의 80년대나 미국의 19세기말 같은 특수한 경험에 기인한 생각이 아닌가 싶네요. 그런 정도의 고도성장이 없다면 '가난한 자를 중산층으로 이끌어내는 사회적 역동성'이란 '중산층이라도 까딱하면 순식간에 빈민으로 전락하는 불안사회'밖에는 의미하지 못하게 되겠죠. (이것이 지금 우리나라 중산층 교육열의 근원이기도 하지요. 신분상승은 고사하고 신분유지를 위해 아둥바둥해야 하는 현실.)

    그런데 경제학자들이 경제성장을 '마법'이라고 부를 정도로, (총요소투입 증가를 넘어선)경제성장의 비결은 여전히 베일 속에 가려져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성장의 마법"은 좌빨이든 우빨이든 정치경제 기조 좀 뚝딱거려서는 만들어낼 수조차 없는 것이죠.

    그런 상황에서 삼저호황기 같은 고도성장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는 "빈민이 노력하면 중산층 될 수 있는 사회" 같은 걸 사회불평등에 대한 대책으로 제시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지 않나 합니다.


    잘살아보자는 비전은 빈민이 정말로 잘 살 현실적 가능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집단이 어떤 비전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 때문에 사회안정과 갈등치유의 효과가 있었습니다. 지금 시대에는 잘살아보자는 고사하고 무슨 비전 그 자체를 공유할 수 없죠. 그놈의 인터넷 때문이든, 다원화 사회 때문이든 간에. 그런데 돌이켜보면 우리,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 같은 좆같은 걸 공유하지 않기 위해 지금껏 그 고생을 해왔던 거 아니었나요?

  • Getthrough 2020/02/13 11:28 #

    말씀하신대로 예전에는 훨씬 못살고 가능성이 없었던 때였음에도 비전을 가졌고 그 자체가 사회안정과 갈등치유가 있었다면 지금은 전국민의 삶의 질이 획기적으로 나아졌는데도 비전을 갖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요, 결국 그 시대의 집단에서 일어나는 팽배한 지향점이나 태도의 문제는 아닐까요. 이렇게 된데는 사회가 극소수의 선동가들에게 의해 지속적으로 오염되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렇게 되면 일차적으로 개인들이 의식의 동력을 잃는거죠..반공이 팽배했던 개발도상국일때와 지금의 큰 차이는국민적 의식의 차이가 컸다고 봅니다.

    또 하나는, 잘살다가 급추락한 베네수엘라 역시 비전 자체를 공유하지 못하고 있죠.. 경제규모가 큰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운운도 원인은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경제적 동력을 잃었기에 불황의 늪에 빠졌고 국민전체가 비전을 잃었죠..그래서 할수 있다는 단순한 희망과 다짐의 문제를 넘어서 경제가 역동적으로 굴러갈수 있는 각종 기반과 제도의 구축이 중요한데요,

    사회적 역동성은 사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비슷하다고 봅니다. 이 거위를 잡아 나눠먹고 끝낼 것인가, 거위가 지속가능하게 알을 낳게 키워낼 것인가는 결국 그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층의 인식이 큰 역할을 하죠. 그런데 우리가 베네수엘라의 사례에서 알수 있듯이, 국민이 지도자를 잘못 선택하면 그 사회는 역동성을 잃고 사망한다. 입니다.

    가난은 인간의 존엄을 무너뜨리죠..오로지 가진자를 허물어뜨리겠다고만 주장하는 지도자가 국민의 가난에 관심이나 있을까 싶습니다..관심있는척 할 뿐이죠..말하고 선동하는것은 돈이 안드니까요.
  • 비트윈 2020/02/13 16:51 #

    원래 봉준호는 학생 시절부터 기득권층 서민층 둘 다 평등하게 까던 사람이라 새삼스럽지도 않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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